나무가 천 년 동안 자란다면?
Q.E.D 증명종료는 추리 만화다. 이 만화는 다른 유명 추리 만화처럼 드라마적인 요소나 SF 요소에 기대지 않는다. 범죄 방법은 약간의 과장이 되어있더라도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며, 범인들은 정신병자 같지 않고 이성적이다. 또한 엄청난 양의 이학, 의학, 인문학, 공학 내용이 양념처럼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실제와 일치한다1. 만화의 광고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이런 내용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어서 짤막하게 써볼까 한다.
만화의 남자 주인공은 토마라는 소년으로, MIT를 이미 졸업했지만 일본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소년이 MIT를 떠나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다른 천재 청년 로키가 토마에게 퀴즈를 하나 낸다.
1m짜리 나무가 하나 있다고 치자. 첫 해에는 1/2m, 둘째 해에는 1/4m하는 식으로 1년 동안 전 해의 반 만큼 성장한다고 했을 때, 이 나무가 천 년 동안 자란다면 높이는 어느 정도가 될까?
이 질문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삐져나온 사람, 이공계라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간단한 등비급수 문제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서 그 풀이를 배운다. 그 다음 대화도 나름 재미있다.
토마 : "천 년이 지난 다음의 높이?"
로키 : "항복이야?"
토마 : "잠깐만!" "그래! 2m도 안되겠다."
"정확히는 2-1/21000로 한 없이 2m에 접근할 뿐이야! 그러니, 천 년이 지나도 2m가 안되지!"
로키 : "쳇, 재미 없어!" "이별의 선물 대신에 낸 마지막 문제였는데."
이 문제의 포인트는, 천 년 씩이나 흘렀으니 매우 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독자가 해주길 원한다는 것. 처음 저 문제가 본문에 등장했을 때,(위 이별신은 과거 회상이다) 여주인공인 카나가 저렇게 생각하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고민을 한 다음에 몇 페이지 더 넘어가서 토마의 해설을 들으면, 1/2의 천 제곱이니 하는 이상한 숫자는 잘 몰라도, 와, 생각보다 별로 안 자라는구나!
하고 신기해 할 수 있을 것.
나야 공돌이니까, 세상에, MIT 학생들이 헤어지면서 고등학교 내신 시험에도 못 나올 수학 문제나 풀고 있다니!
했지만, 다른 독자들은 어떨까 싶었다. 정말로 이걸 재밌어하려나?
사실 이런 문제는 단편적 예. 만화나 영화를 보면 정말 수도 없이 보게 된다. 보여주기 위한 어려움. 일종의 과학적 사실을 포장한 마술쇼와 비슷한 것 같다. 그나마 위 문제처럼 말이나 되면 다행인 편이다. 각종 첩보 영화의 해킹신이나, 썸머워즈에서의 공개 키 암호 암산 해독(!), 원피스의 번개를 맞아도 끄떡없는 고무 같은 것들.
중학교 무렵까지는 이런 고증 부족에 굉장히 거부감이 들었지만, 요즘은 그냥 웃고 지나간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학교 수업만 들었어도 말이 안된다는 걸 깨달을 정도의 내용도 많지만, 까놓고 말해서 고등학교 때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얼마나 됐겠는가. 그리고 그걸 기억할 사람은 더 없을테고. 만화가(또는 감독)의 의도는 그냥 적당히 설명을 붙여서 재밌게 만드는 것이었을테니까, 사람들이 듣고 흥미로워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Q.E.D 증명종료는 그런 면에선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만화다. 많은 추리가 납득가는 선에서 설명이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저 문제를 보니 재밌더라. 고증엔 문제가 없는데 일반인 수준에도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고, 근데 몰라도 별로 재미 없어할 것 같고…. 적당히 천재 같은 멋을 내려고 넣은 요소인데 천재 같진 않고, 또 멋도 없을 것 같다니! …나만 재밌나? 나도 점점 뭘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풀이
참고로 풀이는 다음과 같다. 글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냥 왠지 문제를 냈으면 풀이를 해줘야할 것 같아서. 등비수열의 합 공식이란 게 있긴 하지만, 쓰지 않겠다. 난 만화에서 이 문제를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풀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공식이 생각이 나지 않더라. 원래 내가 기억력은 깡통이라서, 공식 같은 거랑 안 친하다.
이 문제의 풀이의 핵심은 답을 S(합을 의미하는 Sum의 머릿글자)로 두는 것. 문제에서 나무는 원래 1m였고, 첫해에 그 반인 1/2m, 그 다음 해에 1/4m 이런 식으로 늘어나므로, 식으로 정리하면 S는 다음과 같다.
> S = 1 + 1/2 + 1/4(1/2 x 1/2) + 1/8(1/2 x 1/2 x 1/2) + … + (1/2를 천 번 곱한 숫자)
별 거 아니다. 그냥 더하기 줄줄 쓴 거다. 천 번 쓰기 귀찮아서 중간에 생략 좀 했다. 풀이를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지수 모양으로 간단하게 써보자.
> S = 1 + 1/2 + 1/22 + 1/23 + … + 1/21000 - 얘를 ①번 식이라고 부르자
여기다가 1/2를 양 변에 곱하면,
> (1/2) x S = 1/2 + 1/22 + 1/23 + 1/24 + … + 1/21001 - 얘를 ②번 식이라고 부르자
이렇게 된다. 뽀인트는, 저렇게 하면 ①번 식과, ②번 식에서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 둘 다 1/2부터 1/21000까지는 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두 식을 서로 뺀다!
> S - (1/2) x S = 1 + 1/2 - 1/2 + 1/22 - 1/22 + 1/23 - 1/23 + … + 1/21000 - 1/21000 - 1/21001
이제 문제는 간단한 1차 방정식! 징그럽게 많던 게 다 없어졌다!
> 1/2 x S = 1 - 1/21001
마지막으로 양 변에 1/2를 곱하면,
> ∴ S = 2 - 1/21000
Q.E.D!(증명 완료를 뜻하는 라틴어)
PS. 쓰다보니 배꼽만 산처럼 커졌다. 그냥 처음부터 수학 교양글 정도로 시작할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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