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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점 발견

오후 여섯 시를 조금 지나 과외가 끝났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한 십 분쯤 걷고 나서 난 그 생각을 정정해야했다. 걷는 거야 원체 좋아해서 별 문제 없었지만, 가방이 무서운 무게로 압박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가기도 뭣하여 그냥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빨리 도착해서 쉬어야지.

난 길을 걷다보면 주변 사물, 사람에 신경을 안 쓰게 되는 편이다. 온갖 잡생각과 상상이 뇌 속에서 헤엄쳐다닌다. 그래도 전정기관과 다리만은 따로 새로운 신경체제를 구축해 최소한 나를 죽지는 않게 균형잡아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보는 방향은 뛰노는 내 생각만큼이나 멋대로 놀아서, 표지판, 편의점, 지나가는 사람, 학교 건물을 마우스로 NPC 선택해보듯이 하나하나 눈으로 찍는다. 당연히 뭘 봤는지 기억하는 일은 잘 없다.

그렇게 시선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맞은 편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다음 순간, 난 머릿속에 흐르던 생각들을 모두 하얗게 잊어버렸다. 눈은 흔들림 없이 한 사람에 고정됐다. 내 머릿속만큼이나 하얀 존재가 마주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지금 기억을 되짚는 시점에서 그 때의 감동을 와닿도록 전하기 위해 각종 표현이나 비유를 가져다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정말로 다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투명한 피부, 적당히 큰 눈, 작고 살짝 닫힌 입. 다섯 발자국 앞에 있을 때 그녀를 발견하고부터,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그 노골적이고 뻔한 시선에도 큰 눈 안의 눈동자는 내 쪽으로 힐끔거릴 줄도 모르고 도도하게 날 지나쳤다. 사람들에 묻혀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내가 지금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방금 파란불이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건너고 난 뒤 바로 후회했다. 뒤쫓아 갔어야했나? 금새 아니라고 고쳐 생각했다. 이 주변은 고등학교, 중학교가 많은 지역이고, 외모로 짐작하건데 분명 고등학생임에 틀림 없었다. 조금 나이 많아 보인다고 생각하면 중학생까지도 어찌어찌 가능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고딩 번호를 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얼굴은 그랬고… 다른 건 어땠지? 옷이라든지, 머리라든지, 키라든지.

놀라운 일이었다. 조금도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다. 글을 쓰는 지금도 얼굴은 눈 앞에 있는 듯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 외의 것들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머리는 검정 색이었고, 상의는 하얀 색이었고, 하의는 어두운 색의 짧은 바지였는데. 머리 모양이고 신발이고 심지어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래도 볼 법한 가슴 크기도 전혀 기억에 없다. 그나마 다리는 선이 예뻤던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마치 얼굴 빼고는 전부 포토샵에서 Blur 효과라도 준 것 같달까?

풍문에 의하면, 남자는 나이가 먹을수록 여자를 볼 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난 아직 얼굴 레벨이니 마음만은 어린갑다. 아, 아까 다리 이야기는 있었지만 신경 쓰지 말자. 원래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를 입으면 본능적으로 스캐닝을 하게 된다. 보고 싶든 보기 싫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 고로 0.1초도 채 걸리지 않는 조건 반사는 시선과는 별개의 일이다.

걷다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와있었다. 다시 아까 횡단보도에서의 일을 생각하다 고등학교 시절 일이 떠올랐다. 친구들(남자)끼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루해서 힘은 빠지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아서 정신도 없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여자들의 점수를 매기게 됐다. 처음에는 백 점 만점으로 시작했는데, 왠지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지는 것 같고, 들키기 쉬울 것 같아 500 점 만점으로 바꾸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는데다 245 같은 숫자나 부르고 있었으니 옆에서 보기엔 더 이상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짓을 몇 번 하다보니 익숙해져서, 같은 멤버끼리 멍때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345." "401." "뭐? 너 그렇게 눈 낮았냐?" "니가 점수가 짠 거야, 인마."

물론 금새 질렸다. 우린 새로운 흥미거리를 찾아나서야 했는데, 도달한 결론은 그다지 창의적이진 못했다. 마침 시내에 놀러나온 차, 우리는 0 점과 500 점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470이라는 경의로운 숫자도 나오고, 평점과 동시에 안구가 정화되는 기적을 느끼긴 했지만, 우리에겐 더 원대한 목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백 밑으로 내려가 시력 저하를 온 몸으로 체험했지만, 이 쓸 데 없이 사명감 넘치는 잉여력 앞엔 한낱 작은 허들에 불과했다.

500 점은 곧 포기했다. 여기가 서울도, 방송국도 아닌데 대체 뭔 삽질인가 싶었다. 하지만 빵점은 아직 가능해! 진정한 음의 무한대의 매력을 찾아내고 말겠어! 굳게 다짐한 우리는 나이의 상한선을 정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 우정, 그리고 용기가 하나되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어릴 적 만화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다시 화이팅을 했다. 그리고…

정말 나락을 기는 병림픽 해설은 여기서 적당히 쫑내기로 하겠다.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들어서 뭐하려고. 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렇다는 거다. 만약 내가 그 때로 돌아가서 그녀를 평가하자면 최소한 490, 기분에 따라 전설의 500 점을 주지 않았을까? 그녀석들한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자랑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뭐하는 짓이야, 그게.

왠지 우울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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