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 0일 째
시험 기간은 공부하기 싫다.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발상이 마구마구 떠오르는 시기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방학 첫 주에 막노동을 뛰어보는 게 어떨까?
난 과외가 하기 싫다. 남 가르쳐주기 쪽팔린 실력으로 선생인척 하는 것도 우습고 지 앞가림도 못하는 대학생 주제에 몇 살 차이난다고 오지랖 넓게 설쳐대는 꼴도 보기 싫다. 그래도 요즘 자금난1을 좀 겪고 나니 과외라도 시켜주면 감사히 받겠다는 꼬라지로 살고 있다.
그러다 생각난 게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어진 게 막노동이다. 드라마 보면 별 사람 다 하던데 왠지 별로 안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2
대학에서 만난 형 曰:
난 여행 가느라 안 갔지만 내 친구들은 재수하면서 많이들 다녔다. 할 만 하다던데?
(이럴 때만 도움 되는)뇌없어 지식즐의 어떤 분 曰: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요령도 필요합니다. 마른 체형이신 분들도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초보한테 빡센 것 안 시킵니다. 가서 배우세요.
아, 바닥에 못 같은 거 조심하시고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열심히 한다고 일당 더 안 줍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결국 내가 알아낸 정보를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 준비물 : 입을 일 없고 버릴 각오한 상의와 바지, 밑 두꺼운 운동화(또는 안전화), 모자
- 장소 : 집 주변 인력소
- 시간 : 5시까지~6시까지의 다채로운 의견
안전화를 신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운동화로 충분하다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필요 없는데 돈 버리기는 아까우니 운동화를 신고 직접 가봐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 대망의 첫날(월요일)
알람을 4:55, 5:00 이중으로 맞춰놓았다. 4:55 알람을 듣고 깼다. '아 이제 5:00 알람 듣고 깨서 준비하면 되겠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6시였다.
2. 재도전의 둘째날(화요일)
낮잠을 푹 자고 '이 정도면 좀 늦게 자도 충분히 일어나겠지.'라고 생각했다. 1시 반 취침. 다음날 아침, 내가 처음으로 본 시계는 10시 반이었다.
하루면 몰라도 이틀을 이렇게 날리자 스스로에게 쪽팔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만 있으면 알람 유무에 관계 없이 칼 같이 일어났었는데. 대학 합격 후 몇 달 동안 급격히 타락했더니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낮에 잠을 잔 후 밤을 새버리기로 마음먹었다.
3. 필승을 다짐한 셋째날(수요일 : 오늘)
집 주위의 당구장에서는 자정이 넘어가 한산해지면 무료 강습을 해준다. 거기서 세 시간 동안 샷 연습을 한 후 집에 돌아와 노트북의 전원을 누르니 네이트온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5시까지 떠들다가 준비를 시작했다. 20분까지 준비를 마치고 나와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이건 계산착오였다. 새벽 전철은 무지하게도 배차 간격이 길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가까웠을 것이라 후회했지만 티머니가 아까워 내 발걸음은 역 밖으로 벗어날 줄을 몰랐다.
도착해보니 벌써 시각은 5:50. 인력소의 위치를 잘 모르겠어서 전화를 해봤다.
뚜루루루루
"엽때여"
"네 xx인력 어쩌구 저쩌구"
"일 하려고 하는…"
"계약 끝났습니다."
"?!"
패닉에 잠겨서 길 가의 지도를 보고 위치를 확인했더니 역시나. 충분히 걸어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서 기분도 상한 김에 산책해서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몇 걸음 걷다보니 인력소가 하나 더 보인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뚫훌뚫훌
"엽때여 일 하려구 하는데여"
"일 다 떨어졌어요. 일찍 좀 오시지."
"헐 일찍요? 얼마나요?"
"적어도 40분까지는 오셔야죠."
아아. 지하 선수 GG~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깊은 고찰을 했다. 밤을 샜는데도 지각을 하다니! 세상에 이보다 부지런하고 멍청한 바보는 없을 것이라 자책하며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싶어 시계를 확인해보니 무려 12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난 대체 왜 지하철을 탄 것일까. 난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아침해를 맞이한다.
너무도 오랜만의 감정을 못이겨
오늘은 여기까지. 말없이 돌아서.
(외쳐 내가 밉다고)
(소리쳐 내가 싫다고)
(팽개쳐 내 감정도)
(차라리 무관심한 세상보다 나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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